참아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점을 두고 미숙하다는 말이 나오는 거겠지만, 실제로 미숙한 그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어둠이 깔린 아발론 경계지의 보초를 서고 있던 단원들이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갑자기 빳빳하게 몸을 굳히고 경례했다. 알터는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겉모습만큼은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보일 수 있도록 애써준 조장들 덕분에 그럭저럭 해나가는 중이었다.
발걸음이 다급해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알터는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단원들이 머무는 숙소로 들어가 문 앞에 서서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아벨린 님.”
“……알터?”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알터는 방으로 뛰어들어가듯 한 후 문을 닫았다. 얼결에 뒷걸음질을 친 아벨린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터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자꾸만 입을 다물었다. 자신과 비슷한 키였던 소년은 성장을 나타내듯 훌쩍 자라 이제는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였고 어딘가 무척 수척해 보였지만, 눈망울에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빛이 서려 있었다. 아벨린은 분명 그 눈빛에 약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추궁하는 대신, 그녀는 알터가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아벨린…님.”
약간 잠긴 목소리로, 알터가 다시 한번 아벨린의 이름을 불렀다. 아벨린이 대답했다.
“말하세요, 알터.”
그 대답에 무언가가 북받친 듯, 알터는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벨린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알터의 어깨를 잡았을 때, 억지로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지금만… 지금만 예전처럼 말을 놔주시면 안 될까요……?”
어깨에 닿은 아벨린의 손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잠깐의 적막 속에서 알터는 어쩌면 희망적인 대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가 언제 한 번이라도, 어리광을 받아주는 존재였던가.
“안됩니다.”
차갑게 들려온 목소리에 알터는 입술 안쪽을 가만히 짓씹었다. 알고 있다. 이런 약한 모습이 옳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알터.”
문득 머리카락에 닿는 손길에 알터는 흠칫 놀랐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아까보다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아벨린의 손이 알터의 갈색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힘들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런 자리이고, 알터는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당신을 그 자리에 앉혀놓은 결정을, 저는 솔직히 아직도 인정할 수 없어요.”
말의 요지는 결국 그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지만, 멈추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상냥했다. 그녀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에게 섣불리 그런 직책을 내린 자들임이 그 손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일이고, 기사단 전체가 알터에게 빚을 지고 있는 거나 다름없죠.”
“…….”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은 맡은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뿐인데, 그녀는 그것마저도 ‘빚’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뭐든 혼자서 해나갈 필요는 없지만…….”
아벨린의 손이 멈췄기에 알터는 조금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는 어리광을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실수에도 그를 내친 적이 없다는 것을.
“계속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거잖니.”
그 말은 분명 알반 기사단 아르후안 조의 조장 아벨린으로서의 것이 아니라, 알터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의 말이었다. 알터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커다랗게 심호흡을 하고, 벌떡 일어섰다. 알터의 얼굴을 본 아벨린이 작게 미소지으며 따라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아벨린 님!”
“감사받을 일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어리광을 부리는 건 저한테만 하세요. 그리고.”
아벨린이 방문을 열어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숙녀 혼자 있는 방에 마음대로 들어오지 마시고요.”
“……그, 그게……!”
이런 면은 훌쩍 커도 변하지 않았다. 아벨린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알터를 내보냈다. 당황하던 알터는 문이 닫히기 전 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했다. 돌아가는 길에, 아까 그와 만났던 단원들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그의 몸짓이 한층 결연해져 있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